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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유럽학회 2013년 E-Newsletter_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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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20주년을 맞는 유럽학회
 
박성조 교수(한국유럽협회 초대회장, 베를린 자유대 종신 정교수)
20주년을 축하한다. 유럽학회의 전신인 한국유럽협회가 발족한 것은 정확히 말한다면 1989년 봄으로 알고 있다. 이해는 한국에서는 올림픽이 끝난 다음해였으며, 유럽에서는 베를린장벽의 붕괴, 냉전의 종식이라는 지각변동의 해였다. 물론 유럽협회를 발족할 당시 이러한 일들을 예상한 것을 아니었다. 다만 소생의 서울대서의 EU통합, 노사관계, 과학기술정책에 많은 학생들이 청강을 했었고, 유럽의 자동차산업에 관해서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기업인들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고 유럽에서 박사학위를 획득하고 귀국한 소장학자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었다.

당시 1988-1989년 소생이 서울 체재 중 라종일 교수를 비롯한 허만, 이숭희, 이창훈 교수 등과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유럽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에 관한 의견교환을 위주로 당시 경희대에서 토론회를 가졌다. 그러자 한번은 여러 소장학자 분들이 유럽에 관한 협회설립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있었다. 사실 본인은 베를린에 직장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알고 보니 이들은 이미 '유럽협회' 설립에 구체적인 복안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소생에게 초대회장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당황했었다. 그때 얼마 있다가 베를린으로 돌아갈 사람이 어떻게 한국의 학회회장을 맡을 수 있는가 반문했더니 한국에서는 연세가 많은 사람이 앞장서야 한다는 의견이었으며, 결국 한국에 있는 여러 후배님들이 학회를 운영해 갈 것이라는 조건하에 회장직을 수락하고 2년간 소생이 형식상 회장을 맡기로 했었다.

유럽협회 발족은 프레스센터에서 시행되었으며 정확한 일정은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당시 행사는 기업인들의 후원으로 성대하게 치렀다. 특히 유럽에서 생활한 학자, 외교관, 회사원, 저널리스트, 기업인들을 찾아 이사직을 일임했었다. 흥미있는 사실은 당시 협회 이사들 중 일부가 유럽에 관한 단체를 설립하는 것을 보고 실망스러웠다.

여하튼 유럽협회는 그 이후 라종일 교수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운영하여 한국에서는 가장 성공적인 지역연구회로 발전했다. 그러나 교수들이 논문을 발표할 수 있는 학술지가 필요하였고, 그러자면 학회의 설립 또한 필요했었다. 이에 따른 이종원, 김대순 교수의 제안으로 협회 산하에 유럽학회를 두기로 하고 학회지를 발간하기로 하였다. 1994년 이래 '유럽연구'라는 학술지를 정기적으로 출판하고 있지만, 향후 학회지로서 '정기적 출판'에 구애 받지 말고 앞으로 질적인 향상이 아쉽다.

유럽은 경제적, 물질적인 면에서 쇠퇴되고 있다는 사실과 유럽의 금융위기, 재정위기로 인한 '통합의 붕괴'가 임박하다는 점성가들 (astrologists)이 한국의 유럽지역학에 바람직하지 않은 임팩트를 주어 유럽연구가 위축되고 있지만 한국의 미래의 발전모델을 찾으려면, 미국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다. 그 답은 유럽에 있다고 생각한다. 유럽연구에서 통해 얻는 우리의 교훈은 너무나 많을 것으로 본다. 미국과 중국이 왜 유럽연구를 그렇게도 체계적으로 하고 있는지 유럽학회도 주시해 보아야 할 것으로 본다.

유럽학회에 다시금 축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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