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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와이파리 2012년 07월 25일 발간)
저자 도널드 서순(Donald Sassoon)은 이집트 카이로에서 태어났고 파리, 밀라노, 런던, 미국 등지에서 공부했다.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런던 대학교 버크벡 칼리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런던 대학교 퀸메리 칼리지에서 유럽 비교사 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현대 이탈리아: 1945년 이후의 정치, 경제, 사회』(1986), 『사회주의 100년: 20세기 서유럽의 좌파』(1996), 국내에도 번역된 『모나리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모나리자'의 역사』(2001), 『무솔리니와 파시즘의 등장』(2007) 등이 있다. 이 5권의 유럽문화사는 1800년부터 2000년까지의 200년의 시기를 서막, 부르조아 문화, 혁명, 국가, 대중매체의 다섯가지 주제 및 시기로 구분하여 유럽문화 전반의 흐름을 보여주려하였다.
유럽 대륙과 러시아는 물론 미국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지역, 시기, 주제를 다루기 위해 도널드 서순은 문화산물의 가치와 의의를 평가하거나 전통적인 고급문화/저급문화 구분을 강조하는 대신, ‘문화시장의 팽창’이라는 관점을 채택한다. 즉 서순은 의도적으로 문화산물이 상품으로서 시장을 통해 생산되고 유통되고 판매되고 소비되는 문화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부유층과 엘리트층이 사치스럽게 즐긴 ‘고급’문화뿐 아니라, 까막눈 하층민의 고된 삶을 위로해준 ‘저급’문화와 20세기 문화의 주역인 ‘대중’의 문화까지 폭넓게 조망한다.
제1부 ‘서막’(1800∼1830)에서는 유럽의 문화산업이 산업화 이전 단계에서 벗어나면서 책, 신문과 정기간행물, 이미지, 악기와 악보, 오페라, 연극 등 주요 문화형식들이 귀족의 전유물에 머물지 않고 시장에서 사고파는 상품으로 자리잡는 과정과 그 과정을 가능하게 한 배경요인들을 폭넓게 살펴본다.
1800년에는 유럽인 대부분이 읽거나 쓸 수 없었고, 책을 사거나 빌릴 돈이 없었고, 그래서 거의 아무것도 읽지 않았다. 그들이 즐길 수 있는 음악이라야 동네 교회나 축제에서 무료로 듣는 것이 전부였다. 연주회와 실황 공연의 관람은 귀족과 중간계급 소수의 특권이었다. 하지만 2000년에는 유럽인 대부분이 다종다양한 책과 신문과 잡지를 읽고, 휴대용 재생장치로 어디서나 음악을 듣고, 영화관과 극장과 공연장을 찾고,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즐기고, 게임을 하고, 인터넷을 이용했다.
이렇듯 지난 200년 사이에 유럽은 즐길 만한 문화가 거의 없는 문화적 궁핍 상태에서 넘쳐나는 문화를 선별해 소비해야 하는 문화적 풍요 상태로 탈바꿈했다. 1800년의 귀족보다 오늘날의 상점 점원이 문화적으로 더 풍요롭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문화시장이 급변했다. 요컨대 유럽인들이 시장을 통해 이용할 수 있는 문화산물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것이다. 그 온갖 종류의 문화산물이 등장하고, 모방되고, 번안되고, 혁신되고, 인기와 상징적 가치를 얻고, 새로운 기술과 형식에 밀려 쇠퇴한 역사가 이 책의 핵심 줄기를 이룬다
도널드 서순에 따르면,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의 경계는 끊임없이 달라진다. 불변하는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를 규정하려는 시도는 헛일이다. 소설은 한때 격이 떨어지고 독자를 타락시키는 저급장르로 여겨졌지만, 문학의 정전을 형성한 세르반테스, 빅토르 위고, 도스토옙스키 같은 작가들 덕택에 싸구려 문학에서 구제받았고, 오늘날 몇몇 소설에는 ‘고전’이라는 근엄한 이름까지 붙어 있다.
서순은 유럽 문화가 산업화 이전 단계를 벗어난 1800년 이후에는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의 구분 자체가 대중시장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하나의 마케팅 행위라고 본다. 문화적 가치의 위계를 규정하는 투쟁에서 고급문화는 다른 사회집단과의 차별화와 상징적 가치를 약속하는 상품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런 관점에서 문화산물의 가치와 의의를 평가하거나 전통적인 고급/저급 구분을 강조하는 대신, 그런 구분을 누가, 어떤 근거로 해왔고, 그 구분이 어떻게 흔들리고 변해왔는지를 추적한다.
문화산물의 수준과 내용을 따지는 보통의 문화사 책은 저급문화에 대해 아예 언급하지 않거나, 언급하더라도 그리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문화시장의 팽창에 초점을 맞추는 서순은 저급문화라도 시장에서 상품으로서 많이 사고 팔린 것이라면 그에 합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외젠 쉬, 세귀르 백작부인, 프랜시스 트롤럽처럼 과거에 비해 인기가 현저히 떨어졌거나 이제 찾아 읽는 사람이 별로 없는 작가라도 당대의 관점에서 균형 있게 서술한다. 요컨대 행상문학에서 싸구려 책, 공포소설, 범죄소설, 연애소설, 성애소설, 멜로드라마, 이탈리아의 즉흥극인 코메디아델라르테, 카바레, 민중극, 삽화와 풍자화, 만화, 대중언론, 대중음악, 포르노그래피, 텔레비전 드라마와 오락물, 리얼리티 TV에 이르기까지, 19세기의 하층민과 20세기의 대중이 즐긴 문화를 고급문화 못지않게 골고루 다룬다.
도널드 서순은 많은 문화가 현금거래관계 밖에서 교환된다는 것, 돈이 다는 아니라는 것, 문화가 쾌락과 위신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사업으로서의 문화, 직업으로서의 문화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서술되는 문화 이야기는 시장을 위한 생산의 이야기다”라고 말한다. 인류는 태곳적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문화를 소비해왔지만, 지난 200년 동안은 문화를 소비할 때 다른 무엇보다도 시장에 의존해왔기 때문이다.
상품으로서의 문화에 초점을 맞춘다는 말은 문화산물이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생산, 유통, 판매, 소비되었는지에 주목한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소설과 관련해서는 작품의 내용이나 질을 따지기보다 작가, 출판업자, 편집자, 인쇄업자, 서적상, 도서관, 도서대여점, 독자, 비평가로 이루어진 상업적 그물망, 소설 한 종의 인쇄부수와 판매부수, 작가의 벌이와 위신, 연재소설 형식이 집필에 부과한 제약, 독서공중의 팽창, 해적판과 저작권, 인쇄기술이 소설의 생산에 미친 영향 따위를 주로 다룬다. 음악과 관련해서는 작곡가와 연주자, 가수의 벌이와 위신, 오페라하우스와 연주회장의 운영, 청중의 관람 태도, 악보의 출판, 악기의 생산과 확산, 음악산업에 혁명을 불러온 소리의 녹음 따위에 주목한다. 또 영화와 관련해서는 영화의 전 세계적 확산, 각 영화의 흥행수익, 미국과 유럽 배급체계의 차이, 영화 관객들의 사회적 구성, 나라별 카르텔과 쿼터제, 전쟁이 영화산업에 미친 영향, 미국 영화의 유럽 시장 침공, 유럽 인재들의 할리우드 유입, 나라별 영화의 특징, 권위주의 국가들의 영화 통제, 메이저 영화사들의 설립과 합병 따위에 초점을 맞춘다. 미술과 관련해서, 『모나리자』를 쓴 미술 전문가인 저자가 ‘상대적으로 한정된, 유일무이한 물건을 파는 투기적인 시장’인 미술을 제외하고 복제 가능한 미술품만을 다룬 까닭 또한 여기에 있다.
서순은 이 밖에 다른 문화형식들을 서술할 때에도 기본적으로 문화를 상품으로 보는 관점을 유지한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경쟁이 치열하고 무엇이 ‘먹혀들지’ 종잡을 수 없는 문화시장에서 팔리기 위해 반복과 모방과 번안과 모험, 즉 ‘보수와 혁신의 끊임없는 투쟁’을 해온 문화상품들의 진화 과정을 넓고도 깊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